Meditation on Bible/PSALM(시편)

본회퍼의 시편 이해

Four Seasons Daddy 2022. 10. 20. 16:54

시편의 이해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부제 : 시편으로 기도하자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l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제자들이 예수께 간청했습니다. 그들 스스로에게는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l  기도하는 법을 배운다! 이것은 어쩌면 모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마음이 너무 힘들면, 스스로 기도를 시작하거나 아예 기도를 포기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오는날 기독교에는, 마음이 본래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l  우리는 종종 마음에 저절로 생기는 모든 것, 즉 소원 소망 한탄 하소연 찬양을 기도와 혼동하곤 합니다.

 

l  기도한다는 것은 단순히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도는 가득 차 있는 마음 혹은 텅 빈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그분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반드시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l  제자들은 기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고 싶지만 대화할 수 없고, 그분 앞에 벙어리처럼 서 있는 것은 커다란 고통입니다.

 

l  모든 부르짖음이 속에서만 메아리치다 사라지고, 마음과 입술이 서로 다르게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느끼게 됩니다.

 

l  엄청난 고난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우리를 도와줄 사람, 기도해 줄 사람을 찾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을 만나고 또 함께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요! 열심히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분명 기도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입니다.

 

l  그런데 만약 예수 자신이 우리를 기도 속으로 이끌어 주셔서 우리가 예수의 기도로 기도한다면, 그리고 예수께서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를 직접 하나님께로 이끄시며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면, 우리는 기도하지 못했던 고통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l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기도하시고, 우리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로 그분과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확신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l  온 마음과 의지가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바르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는 기도할 수 있으며, 그분과 더불어 우리의 기도가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l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하나님께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언어로 그분과 대화하는 법을 배웁니다.

 

l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언어를 따라 말하면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거짓된 마음과 혼란스러운 언어가 아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분명하고도 깨끗한 언어로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여 주실 것입니다.

 

l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어는 성경을 통해 접하게 됩니다. 확신과 기쁨으로 기도하고 싶다면 성경이 확고한 토대가 되어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l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발판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우기

 

l  성경을 이루고 있는 여러 책 중에서 오직 기도문으로만 이루어진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성경 속에 기도의 책이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l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께 드리는 시편 기도역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올바른 기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울 수 있다는 사실, 우리 인간들과 함께사셨던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이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아버지께 기도가 되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l  예수그리스도는 인간의 모든 고난, 모든 기쁨, 모든 감사, 모든 소망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갑니다.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인간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l  우리가 예수의 기도로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 인간의 말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드리는 기도이고, 우리를 예수안에서, 예수를 통해 하나님 앞으로 데려갑니다.

 

l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와 함께라야만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l  그러므로 성경의 기도들, 특히 시편을 읽고 시편으로 기도하고 싶다면, 시편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냐고 묻기 전에 먼저 예수그리스도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l  시편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서야 비로소 시편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l  시편이 우리의 감정 상태를 얼마나 잘 표현하는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올바르게 기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다르게 기도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당장 기도하고 싶다는 우리의 마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왜 우리가 기도하길 원하시는지 아는 것입니다.

 

l  우리의 가난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부요함이 우리의 기도를 가득 채우길 원하십니다.

 

l  성경 속에 기도책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려는 말씀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듣기 원하시는 바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l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써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시편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시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l  성경 속의 모든 기도는 주기도문으로 요약됩니다. 성경 속의 모든 기도는 주기도문의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함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 기도들은 주기도문에 의해 불필요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기도문의 무한한 부요함이 됩니다.

 

l  주기도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는지를 가려주는 시금석이 됩니다. 그러므로 시편이 신약성경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시각은 바람직합니다.

 

l  시편은 예수그리스도 교회의 기도이며, 또한 주기도문 속에 들어 있습니다.

 

 

 

 

 

 

 

 

시편의 기도자

 

l  150편의 시편 가운데

다윗 왕이 73

다윗이 임명한 음악가 아삽이 12

다윗의 지도하에 레위 지파의 음악 가문인 고라 자손 12

솔로몬 왕이 2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음악가 헤만과 에단이 각각 1

 

l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영의 능력을 받아 노래로 악신을 쫓아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전해진 그의 시편 가운데 기름부음 받기 전의 작품은 한 편도 없습니다.

 

l  메시아적 왕, 그 가계에서 약속된 왕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다윗 왕이 이 노래들로 기도했고, 이는 나중에 성경의 정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l  성경은 다윗을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증언합니다. 다윗에게 일어나는 일은, 그의 안에 있어 후에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l  성경은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2:30-3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l  다윗은 자신의 직분과 삶, 그리고 자신의 언어로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그리스도가 다윗과 함께, 아니, 오히려 그리스도 자신이 직접 그의 선조 다윗 안에서 기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l  신약성경의 이 짧은 언급은 시편 전체에 중요한 빛을 던져 줍니다. 그것은 다윗을 그리스도와 연관 지어 줍니다.

 

l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윗이 단지 자기 마음의 감동대로 기도했다기보다는, 그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가 기도했다는 점입니다 시편의 기도자는 비록 자기 자신이 기도하는 것이긴 했지만, 이미 그리스도가 그 안에, 그와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l  다윗의 이름과 연결된 모든 시편이 아주 중요하며,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복음을 시편 전반이 선포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l  한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가 동시에 시편으로 기도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모든 인간의 연약함을 자신의 몸에 짊어지고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가 바로 이곳에서 전 인류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털어놓고,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l  그는 고통과 고난, 죄와 죽음을 우리보다 더 깊이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의 기도는 그가 받으신 인성으로 드리는 기도이며, 하나님 앞에 상달된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 우리의 기도입니다.

 

l  그러나 또 그 기도가 진정 예수의 기도인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그가 우리를 더 잘 아시기 때문이며 그분이 우리를 위한 참된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는 바로 예수의 기도였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l  누가 시편으로 기도합니까? 다윗이 기도했고 그리스도가 기도했으며 우리가 기도합니다. 우리란 바로 온 교회로서, 오직 이 교회 속에서만 시편의 모든 풍성함을 기도로 드릴 수 있고, 우리는 또한 마침내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와 자신의 교회에 참여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l  다윗, 그리스도, 교회, 나 자신, 그리고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묵상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기 위해 가셨던 놀라운 길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제목,음악,구절

 

l  시편의 히브리어 제목은 찬송가”(성가)입니다. 시편7220절에서는 이전의 모든 시편을 다윗의 기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l  시편은 찬송하는 노래만 들어 있지도, 기도만 들어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교훈시나 애가도 근본적으로는 찬송가 입니다. 이 노래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l  시편 제목에 달려 있는 이해하기 힘든 여러 문구는 악장에게 주는 지침입니다. 시편 중간중간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셀라라는 말도 그 자리에 간주곡을 삽입하라는 표시로 보입니다.

 

l  셀라는 사람들이 침묵하면서 시편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할 것을 말한다. 성령이 그들에게 보여 주시는 것들을 깨닫도록 평온하고 고요한 영혼의 상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루터)

 

l  시편은 대개 주고받으면서 노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르 위해 시편은 두 구절씩 서로 연결되어 있어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하면서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사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병행법이라고 합니다.

 

l  이러한 형태는 우연이 아니며 오히려 기도가 끊이지 않도록 우리를 부르고, 함께 기도하도록 초대합니다.

 

l  후다닥 해치우듯이 기도하는 데 익숙한 우리에게 이런 형태는 불필요한 반복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실제로 기도에 올바르게 침잠하고 집중하게 해주는 동시에, 다양한 단어로 기도하는 모든 신자가 결국은 똑 같은 기도를 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예배와 시편

 

l  주일마다 혹은 매일 시편을 돌아가면서 함께 읽거나 노래로 부르는 교회가 많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은 엄청난 부요함을 누립니다. 우리는 단지 시편을 매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기도책을 통해 성장해 가기 때문입니다.

 

l  시편의 기도들은 가끔씩 읽기만해도 우리의 생각과 힘을 매우 강하게 해줍니다. 시편을 규칙적으로 진지하게 기도하기 시작한 사람은, 시편의 풍성함과 힘 그리고 강렬함과 열정을 공급받습니다. 그리고 온화하고 부드럽습니다.

 

l  고대 교회에서는 다윗의 시편 전체를 암기하는 일이 흔했는데 이는 동방교회에서 교회 직분자의 전제 조거이었기 때문입니다.

 

l  시편은 초창기 기독교의 생명력을 충만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시편의 언어로 말씀하시면서 돌아가셨다는 점입니다.

 

l  시편 기도가 다시 회복되면 상상할 수 없는 힘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시편의 주요 주제

 

l  시편 기도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주제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창조, 율법, 구속사, 메시아, 교회, 생명, 고난, , 원수들, 종말입니다.

 

창조

 

l  성경은 하나님을 천지의 창조자로 선포하고 많은 시편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과 감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창조에 대해서만 말하는 시편은 하나도 없습니다.

 

l  시편이 말하는 것은 항상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으로 이미 계시하신 하나님, 세상의 창조자로 알려질 그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창조자로 믿을 수 있습니다.

 

l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셨던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을 나타내는 형상입니다. 우리는 구원자로서 자신을 계시하신 창조주를 경배합니다.

 

l  시편8편은 하나님의 이름과 그가 인류에게 행하신 자비로운 일을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찬양합니다. 이는 창조의 차원만으로는 다 파악할 수 없는 것입니다.

 

l  시편19편은 별들이 운행하는 장엄함에 대해 언급하면서 동시에 그보다 더 장엄한 하나님의 율법 계시를 생각하게 하고 회개를 촉구합니다.

 

l  시편29편은 천둥번개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엄청난 위력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그 목적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권능과 복,평화입니다.

 

l  시편104은 하나님의 작품들이 보여 주는 풍부함을 눈앞에 펼쳐 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노래는 그 풍부한 피조물도 전부 하나님 앞에서는 실상 아무것도 아니며,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 때에 그분이 죄인들을 멸절하신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l  창조시편은 서정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안내서로서, 그들이 경험한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천지의 창조자를 발견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l  창조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는다면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은 선합니다.(딤전 4:4). 그러나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피조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와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입니다.

 

l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은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 안에서, 또 그분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율법

 

l  시편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의 율법을 감사, 찬양, 간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세 시편인 1, 19, 119편은 무엇보다도 율법의 은혜를 우리의 눈앞에 펼쳐 주고자 합니다.

 

l  율법이란 하나님의 구원 사역 전체새로이 사는 순종의 삶을 위한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에 대한 기쁨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생명에 커다란 전환을 이루어 주실 때 우리 안에 가득 차게 됩니다.

 

l  하나님의 명령을 아는 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만든 계획과 갈등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또한 우리의 걸음을 확실하게 하며 우리의 길을 기쁘게 해줍니다. 하나님이 계명을 주시는 것은 그것을 성취하시기 위함이며, 그 계명들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발견한 모든 자에게 무거운 것이 아니게 됩니다.(요일 5:3)

 

l  바로 예수 자신이 율법 아래서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율법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이며 양식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은혜를 감사하며 그의 성취로 인한 기쁨을 우리에게 선물하십니다.

 

l  이제 우리는 율법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합니다. 율법을 기꺼이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우리가 율법 안에서 흠 없이 보존되기를 간구합니다. 이것을 우리의 힘으로 하지 않고, 오직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구속사

 

l  시편 78, 105, 106편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의 역사에 대해, 하나님이 백성으로 택해 주신 은혜와 신실함에 대해 말하는 한편, 그분의 백성들의 신실하지 못함과 배은망덕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l  시편78편은 누구에게 기도하는 것인지도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 시편들로 기도할 수 있을까요?

 

l  시편106편은 우리에게 감사, 경배, 맹세, 간구, , 고백 그리고 도움의 요청을 과거의 구속사에 비추어 기도로 올려 드릴 것을 촉구합니다.

 

l  이 시편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영원토록 이어지며 오늘 우리가 우리의 조상들처럼 경험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시요, 애굽에서 골고다에 이르기까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적을 경배하는 시이며,

 

l  하나님의 계명을 더욱 신실하게 지키겠다는 맹세의 시인 동시에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시입니다

 

l  그리고 큰 자비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로 가득하고 신실하지 못하며 무가치하다는 고백의 시이며, 하나님의 백성의 마지막 소집과 구원을 간구하며 도움을 구하는 시입니다.

 

l  이러한 시편(78,105,106)을 가지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과거에 그의 백성에게 행하신 모든 것을 마치 지금 우리에게 행하신 것으로 여기면서 우리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그 성취를 위하여 기도하며, 마침내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교회와 함께, 우리를 도우시며 앞으로도 도와주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기를 기대합니다.

 

l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간구할 수 있고, 죄 고백과 신앙고백을 드릴 수 있습니다.

 

 

메시아

 

l  하나님의 구속사는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내시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예수의 해석에 따르면 시편은 메시아에 대하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편 22편과 69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한 시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l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22편 첫 부분을 직접 기도하심으로써 이 시편을 분명하게 자기의 기도로 삼으셨습니다. 히브리서 212절은 시편 22 22절을 그리스도가 한 말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228절과 18절은 예수의 십자가 수난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입니다.

 

l  다윗이 한때 이 시편을 자신의 노래로 직접 부른 것은, 그가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아 핍박받은 왕이자 훗날 자손 중에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할 자로서 노래한 것입니다

l  그는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품은 자로서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기도를 받아들이셨을 때, 이 기도는 비로서 완전한 의미를 얻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에서만 이 시편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로서 말입니다.

 

l  우연히 일어나는 개인적인 고난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임한 그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시편으로 기도합니다.

 

l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시는 것을 듣고, 그분을 통해 저 구약의 왕이 기도하는 것을 듣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모든 깊이를 측정할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지만, 시편의 기도를 따라하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l  시편 695절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자신의 우매함과 죄악에 대해 호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다윗은 분명히 자신의 개인적인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시편을 통해 모든 인간, 다윗과 나를 포함한 온 인류의 죄를 이야기하며, 이 죄를 짊어진 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고난당하십니다.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시편으로 기도하며 우리를 자신의 기도속으로 데려갑니다.

 

l  시편2편과 110편은 원수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와 그리스도 나라의 건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통한 경배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또다시 다윗과 그의 왕국에 대한 예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에게서 이미 미래의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l  루터는 시편 110편을 사랑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시편이라고 말합니다.

 

l  시편 20편은 원수에 대해 메시아적 왕이 승리하기를, 그리고 그의 번제를 하나님이 받으시기를 구합니다. 시편 21편은 왕의 승리와 왕위 즉위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시편 72편은 하나님의 공의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도움, 하나님 나라의 평화와 항구적인 통치, 그리고 영원한 영광을 간구합니다.

 

l  우리는 이 시편들을 통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하기를 기도하고, 이미 성취된 승리에 감사하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평화와  정의가 세워지기를 간구합니다. 시편 616절이하와 6311절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l  논쟁의 여지가 많은 45편은 메시아적인 왕에 대한 사랑, 그의 아름다움과 부요함, 그의 권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왕과의 결혼식에서 신부는 자기 백성과 자기 아버지 집안을 잊어야 하며,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해야 합니다. 오직 왕을 위해서만 단장하고, 기쁨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l  이것은 우리의 왕이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 속한 교회의 사랑 노래이며 기도입니다.

 

 

교회

 

l  시편 27, 42, 46, 48, 63, 81, 84, 87편 등은 하나님의 도시 예루살렘과 하나님 백성들의 큰 축제, 그리고 성전과 아름다운 예배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공동체에 임하신 구원의 하나님을 보여 주며, 이는 우리가 감사하고 기뻐하며 고대하는 바입니다.

 

l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시온산과 성전은, 우리에게 온 세상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교회 즉 하나님이 향상 자신의 말씀과 성례로 그 안에 거하시는 교회와 같습니다. 이러한 교회는 모든 원수의 대항에도 건재할 것이며(46), 이방세계의 지배하에 있던 포로생활은 끝나게 될 것입니다.(126,137)

 

l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에 임재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은 시편들의 모든 감사와 모든 기쁨과 모든 소망의 성취이십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 가운데 완전한 친밀한과 임재로 거하여 주시기를 우리와 함께 기도하십니다.

l  하나님은 교회의 예배 중에 임재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질서에 따라 예배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예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리셨고, 그분은 자신을 흠 없는 희생제물로 기꺼이드려 이전에 제정된 모든 제사를 완성하셨습니다.

 

l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제사를 자기 안에서 드린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다만 기도와 노래와 하나님의 계명을 좇아 사는 삶으로써 찬양과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뿐입니다.(15,50) 따라서 우리의 모든 삶은 예배하는 삶이며 감사제사를 드리는 삶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감사제사를 인정하시고 감사하는 자에게 그의 구원을 나타내십니다(50:23)

 

l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교회에서 마음과 입술과 손으로 그분을 찬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시편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생명

 

l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은 시편의 기도가 빈번히 생명과 행복을 간구한다는 점에 놀라곤 합니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보면서 우리의 생명이나 하나님의 축복은 불확실하며 그렇게 욕심낼 만한 것이 아니라고 잘못 인식하곤 합니다.

 

l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육신의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한 기도를 의미하듯이, 생명, 건강,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가시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것은 생명의 창조자요 보호자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 필수적으로 포함됩니다. 육신의 생명을 가벼이 여길 수는 없습니다.

 

l  오히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그와 교제하여 지금의 삶, 나아가 장차 올 삶을 그분 앞에서 살도록 하십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상에 속한 기도를 주셔서 그분을 더 잘 알고, 찬양하며, 사랑하도록 하십니다.

l  하나님은 이 땅 위에서 경건한 자들이 잘되기를 원하십니다(37) 시편으로 생명, 건강, 평화, 세속의 재산을 간구할 때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l  시편에서처럼 이 모든 것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의 증거로 깨닫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목숨보다 더 낫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붙들 수 있다면 말입니다. (63:3-4, 73:25-26)

 

l  시편 103편은 생명을 지켜 주시는 것부터 죄의 용서까지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가 지닌 커다란 통일성을 알게 하며,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합니다.(시편 65편과 비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창조주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l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을 때 세상에서 소유한 모든 재물을 버리게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준비시키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또 그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생명을 위해 물질을 간구하며 확신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l  그러나 우리가 필요한 것을 받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에게 그러한 은혜를 주셨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야 합니다.

 

 

고난

 

l  시편은 세상에서 겪는 온갖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올바른 법을 숱하게 가르칩니다. 시편은 심한 중병,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깊은 상실감, 위협, 핍박, 감금 그리고 이 땅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갖가지 위급한 상황 등 이 모든 고통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13,31,35,41,44,54,55,56,61,74,79,86,88,102,105)

 

l  이 시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부인하지도 않으며 경건한 말로 속이지도 않습니다. 이 시편들은 이 모든 고난을 신앙에 닥친 시련으로 적나라하게 담고 있으며, 때로는 더 이상 고난을 뛰어넘지 못하기도 합니다. (시편 88)

 

l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이 탄식의 시편들은 개인의 경험으로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l  이 시편들에 펼쳐진 탄식과 고통은 모든 시대에 걸쳐 있는 전 교회 공동체의 고난, 예수 그리스도만이 홀로 온전히 겪으신 그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l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생겨나고 실로 하나님이 그 고난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니, 우리를 도우실 분도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이에 따라 고난에 대한 모든 질문도 다시금 하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l  시편의 화자 중 그 누구도 고난 가운데 재빨리 항복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긴 경우가 없습니다. 항상 저항하고 두려워하며 의심한는 과정을 거칩니다. 경건한 자들이 불행을 당하게 내버려 두고, 악한 자들이 잘되게 놔두는 하나님의 정의라니, 하나님의 선하시고 은혜로우신 뜻에 대한 확신이 뒤흔들립니다. 하나님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l  그러나 가장 깉은 절망 속에서도 호소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고난당하는 자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고, 자기 연민에 빠져 모든 고난의 근원이자 목표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지도 않습니다.

 

l  고난당하는 자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과 싸웁니다. 그분의 언약을 상기시키고, 이전에 베푸신 복과 사람들속에 드러났던 그 이름의 영광을 셀 수 없이 상기시키며 진노하시는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l  모든 시편은 공통적으로 모든 고난과 시험을 하나님께 내던집니다. 우리는 이 모든 고난과 시험을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사오니 이것을 우리에게서 거두어 가시고 당신이 대신 짊어져 주소서. 오직 당신만이 이 고난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 시편들은 질병을 비롯한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짊어지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합니다.

 

l  이 시편들은 고난 속에서 유일한 도움은 그리스도라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탄식 시편은 정의이며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을 다루고 있습니다.

 

l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기도의 목표일 뿐 아니라 직접 우리의 기도 가운데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고난을 홀로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그것들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l  예수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럽게 울부짖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l  이제 우리는 이 땅 위의 그 어떠한 고난도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고난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며, 기도하시고, 도와주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l  이 때문에 많은 위대한 믿음의 시편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헛된 것이며 확실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자기 신뢰의 또 다른 형태에 불과합니다.

 

l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고난 중에 들어오심을 아는 사람은 큰 믿음을 가지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l  시편에서 죄 용서에 대한 기도는 생각보다 훨씬 적게 나옵니다. 기도를 죄 용서에만 국한하면 기독교의 기도는 축소되며 위태로워집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의연하게 자신으로부터 죄를 떨쳐낼 수 있습니다.

 

l  시편에는 소위 회개 시편으로 불리는 일곱 개의 시가 있습니다. (6,32,38,51,102,130,143) 그러나 시편 14,15,25,31,39,40,41편 등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아주 깊은 죄 인식으로 이끌며 죄를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 줍니다.

 

l  루터가 바울적인 시편들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이 시편들은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는 은혜를 온전히 믿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대부분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중한 죄(31,51)때문이기도, 혹은 회개로 이끄는 예상치 못한 고난(38,102) 때문이기도 합니다.

 

l  그때마다 모든 소망은 값없는 용서,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으로 모든 시대마다 주시고 약속하신 값없는 용서에 달려 있습니다.

 

l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시편으로 기도하는 것을 그다지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역시 우리와 함께 이 시편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l  죄 없는 자가 우리를 대신하여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죄인이 되셨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고후5:21) 예수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 자신이 직접 짊어지고 그로인해 고난당하신 우리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l  그는 온전히 우리의 자리에 오셔서 하나님 앞에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십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와 함께 모든 기도 중 가장 인간적인 기도를 하는 동시에 자신이 하나님의 참된 아들임을 증명합니다.

 

l  개신교도들에게 특히 눈에 띄고 거슬리는 것은, 시편이 종종 경건한 자들의 죄뿐만 아니라 그들의 결백함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는 사실입니다.(5,7,9,16,17,26,35,41,44,59,66,73,86 등 참조).

 

l  자신의 무죄함에 대해 자신이 의롭다는 방식으로 말할 수도있지만, 겸손하게 드리는 죄 고백 또한 자기 의에 빠져 기도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도 자신의 무죄를 말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지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l  그러나 이것은 기도의 동기에 대한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기도 내용 자체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철저히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자신의 무죄와 의에 대한 중요성도 말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l  그리스도인이 믿는 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히 의롭고 무죄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8:1)

 

l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이 무죄와 의로움을 확실히 붙들며 하나님의 말씀에 호소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l  그래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겸손하게,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18:23).”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 흠을 찾지 못하셨습니다.(17:3) 이러한 기도로 우리는 신약의 한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동체 안에 섭니다.

 

l  무죄에 대한 주장은 악한 원수들로 인한 고난을 다루는 시편에서 특히 강조됩니다. 여기서 우선시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의 정당성이며, 이는 반드시 그 일에 마음 쓰는 자의 정당성 또한 입증해 줍니다.

 

l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핍박받는 것은 진실로 우리를 하나님의 대적들과 대조되는 의로운 자리에 서게 합니다. 한편 객관적인 결백과 더불어, 그것이 결코 객관적이기만 할 수 없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늘 개인적으로 임한다는 점에서, 시편에는 개인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시도 나란히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정말로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쓰고 있다는 표현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단숨에 이어서 또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43:1)

 

l  우리 안에 어떤 잘못이 남아 있는 한 결코 죄 없이 고난당할 수 없다는 생각은, 완전히 비성경적이며 잘못된 생각입니다. 구약도 신약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핍박받는다면 우리는 죄 없이 고난받는 것이며 하나님과 함께 고난받는 것입니다.

 

l  그리고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과 함께 무죄하며 따라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우리가 우리 죄의 용서를 간구한다는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l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들 앞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무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일 가운데로 이끄셔서, 우리가 거기에 함께하는 자임을 보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l  그래서 무죄에 관한 모든 시편은 다음의 찬송가 가사로 귀결됩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의가 나의 장식이요 영광의 옷일세, 그 옷 입고 하나님 앞에 서리 저 천국 갈 때” (독일찬송가 1541)

 

 

원수들

 

l  복수의 시편은 다른 모든 시편 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곤란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복수의 사상은 놀랍도록 빈번하게 시편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5.79,10,13,16,21,23,28,31,36,40,41,44,52,54,55,58,59,68,69,70,71,137편 등)

 

l  이 시편으로 기도하려는 시도는 항상 실패하고 맙니다. 이 시편들은 정말이지 신약성경보다 신앙적으로 한 단계 낮은 듯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의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l  그러나 어떻게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를 바라는 시편으로 기도할 수 있단 말입니까? 게다가 이런 복수의 시편을 어떻게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로 이해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l  그러나 주의해서 살펴보십시오! 이해할 수 없는 그 동기가 아니라,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한번 질문해 봅시다.

 

l  여기서 말하는 원수들이란 하나님 때문에 우리를 공격하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원수들을 의미합니다. 복수에 대한 시편은 그 어디에서도 사적인 다툼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l  시편 기자는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복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전적으로 복수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12:19) 그래서 자신은 모든 사적인 복수의 생각을 떨쳐 버립니다.

 

l  실로 무죄한 사람만이 원수를 향한 복수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수를 바라는 기도는 죄의 심판 때 그분의 정의가 집행되길 바라는 기도입니다.

 

l  하나님의 복수는 죄인에게 행해진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죄가 없으시고 죄인을 대신하러 오신 하나님 아들에게 행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편에서 간구하는 하나님의 복수를 친히 당하신 것입니다.

 

l  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하셨고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l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해서 짊어지신 예수 외에는 누구도 그렇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모든 잘못된 생각, 하난님은 죌ㄹ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끝을 고하는 것입니다.

 

l  하나님은 그분의 원수에게 증오를 드러내며 심판을 행하려 하실 때, 그것을 유일한 의인 곧 그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는 이에게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l  그래서 복수의 시편은 우리를 예수의 십자가로, 곧 원수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니믜 사랑으로 인도해 줍니다. 나 자신은 하나님의 원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으며, 나는 그분을 통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l  물론 내가 시편을 가지고 언약의 시대에 기도하느냐, 약속 성취의 시대에 기도하느냐에 따라 중요한 차이가 있지만, 이런한 차이는 다른 시편에도 모두 해당되는 것입니다.

 

l  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성취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복수 시편으로 기도하며, 복수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그의 원수에게 공의를 행하시기를 간구합니다.

 

l  나는 하나님이 끝내 신실하셨으며 십자가 위 진노의 심판으로 공의를 지키셨다는 사실, 그리하여 이 진노가 이제는 기쁨과 은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l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자신의 육체에 하나님의 복수를 행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를 비롯한 하나님의 모든 원수를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진지함과 은혜 가운데로 이끄십니다.

 

l  오늘날까지도 나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원수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에게 대항하는 자,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져야 할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파괴하는 자는, 이 세상이나 저세상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자신이 직접 짊어져야 합니다.

 

l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자에게 이 저주가 해당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는 구약성경에서도 말하는 바이지만, 신약은 이에 더하여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을 행하시는 날에 있을 교회의 기쁨도 말합니다.(1:8; 고전 16:22, 18,19, 20:12)

 

l  이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우리가 복수의 시편을 바르게 기도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종말

 

l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예수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시편은 이러한 소망을 말로써 직접 표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예수의 부활 이후 세분화되어 만물의 종말까지 길게 늘어진 일련의 구속사적 사건들은, 구약의 시각에서는 아직 나뉘지 않은 하나의 전체입니디.

 

l  시편에서 기도의 주제는 계시의 하나님과 연합한 삶, 이 세상에서 이뤄질 하나님의 최종적인 승리, 그리고 메시아적인 왕권을 세우는 것입니다.

 

l  이 점에서 시편은 신약과 다르지 않습니다. 시편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연합을 간구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그 연합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이르며, 이 땅에서의 삶과 대조를 이루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17:14-15)

 

l  따라서 하나님과 연합한 생명은 항상 죽음을 넘어 저편에 있습니다. 물론 죽음은 육체와 영혼에 되돌릴 수 없는 쓰라린 종말입니다. 죽음은 죄의 대가이며,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39,90)

 

l  그러나 죽음 저편에는 영원한 하나님이 계십니다. (90,102) 그러므로 죽음이 아닌 생명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할 것입니다. (16:9 이하,56:13, 29:15, 73:24-25, 118:17이하). 우리는 이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가운데서 발견하며 우리는 이 세상과 저세상에서의 생명을 위해 간구합니다.

 

l  하나님과 그의 메시아의 최후 승리에 대한 시편 (2,96,97,98,110,148-150)은 우리를 만물의 종말에 대한 찬양,감사와 간구로 이끕니다. 그때에 온 세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구원받은 교회가 하나님과 영원히 다스리며, 악의 세력이 무너지고 하나님이 홀로 권세를 가지실 것입니다.

 

 

생명의 영을 바라는 기도

 

l  사랑하는 우리 주님은 시편과 주기도문을 주셔서 기도하도록 가르치시고, 또한 기도와 은혜의 영을 부어 주시어 우리가 열정과 진실한 믿음으로, 바르게 그리고 쉼 없이 기도할 수 있게 하신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명하셨고, 우리에게 받기 원하신다. 그에게 찬송과 영광과 감사를. 아멘” (루터)

 

아침 기도의 축복

 

l  하루 전체가 질서정연해지는 것은 거기에 통일성이 있을 때입니다. 이러한 통일성은 아침 기도 때 구하고 얻어야 하며, 이는 일을 할 때 확실해집니다. 아침의 기도는 그날을 결정합니다.

 

l  우리가 부끄럽게 낭비한 시간, 이기지 못한 유혹들, 연약함과 낙담 속에서 일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나 우리의 생각에서 나타나는 무질서함과 방종은, 종종 아침 기도의 소홀함에서 비롯됩니다.

 

l  질서와 시간 안배는 기도를 통해 더 뚜렷해집니다. 주중에 따라오는 유혹들은 아침에 하나님께 부르짖는것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결정을 해야 할 때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 그 일은 더 쉽고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l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말라” (3:23)

 

l  기계적으로 하는 일에서도 하나님과 그분의 명령을 의식한다면 더 참을성 있게 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는 힘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가 일하는 데 필요한 힘을 주시도록 간구하는 그곳에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