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iar Everything 1076

중화민국 수립 연보

1910 1911 동맹회의 황흥 등 봉기, 청군에 진압됨 (황화강사건) 무창의 신군 동맹회 봉기,신해혁명 시작 혁명군 무한삼진점령, 중화민국 군정부조직 청조,원세개를 내각총리대신에 임명함 원세개 북경에 입성,내각을 조직 1912 쑨원 남경에서 임시 대총통에 취임, 중화민국을 선포 선통제 퇴위, 원세개 임시공화정부 조직 권한 받음 쑨원 중화민국 임시약법 공포 국회조직법 공포 1913 국민당의 송교인 원세개에게 피살됨 강서도독 이열균 독립선언 안휘 호남 광동 복건 사천도 독립 쑨원 제2혁명에 실패, 다시일본망명 원세개 대총통 취임 원세개 국민당 해산명령 내림 1914 원세개 국회해산 원세개 중화민국 약법을 개정,대총통권한강화 쑨원 일본 동경에서 중화혁명당조직 1915 1 일본 중국에 21개 조항요구 3 국민..

강화도조약 (1876년 고종13년)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은 1876년 2월 27일(고종 13년 음력 2월 3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통상 조약이며, 한일수호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흔히 강화도조약이라 한다. 한일 관계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으며,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일본의 강압적 위협으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이다. 배경 일본은 자신들이 일으킨 운요호 사건을 핑계로 1876년 1월 30일 조선에 군함과 함께 전권대사를 보내 협상을 강요하였다. 이때 일본에서는 정한론의 기조에 따라 운요호 사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사죄, 조선 영해의 자유항행, 강화 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조건으로 조선을 개국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표면상으로 운요호 사건의 평화적 해결, 통상수호조약의 체결이란 구실..

임오군란(결과 및 평가)

결과 및 평가 군변으로 시작한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개입을 확대시키는 국제문제로 변하였고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외세를 빌려 군란을 진압한 민씨 정권은 결국 자주성을 잃고, 정권 유지를 위해 청나라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댓가로 청나라의 숱한 간섭을 받게 되었다. 또 일본과는 7월 17일 임오군란의 뒤처리로 손해배상금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 조약 및 조·일수호조규속약(朝日修好條規續約)을 체결함으로써 자주권을 더욱 잃게 되었다.청나라는 이후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한다. 곧, 원세개(袁世凱)가 지휘하는 군대를 상주시켜 조선 군대를 훈련시키고, 마건상(馬建常)과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이 간여하였다. 또,..

임오군란(경과)

경과 7월 19일(음력 6월 5일), 전라도 조미(全羅道漕米)가 도착되자 선혜청 도봉소(都捧所)에서는 우선 무위영 소속의 옛 훈련도감 군병들에게 1개월분의 급료를 지불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혜청 고직(庫直)의 농간으로 겨와 모래가 섞였을 뿐 아니라 두량(斗量)도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 군료의 수령을 거부하고 시비를 따지게 되었다. 민겸호의 하인인 군료 지급 담당자가 불손한 언동까지 하자 군병들은 격노하였다. 옛 훈련도감 포수(砲手) 김춘영(金春永)·유복만(柳卜萬)·정의길(鄭義吉)·강명준(姜命俊) 등을 선두로 하여 군료의 수령을 거부하고 선혜청 고직과 무위영 영관(營官)에게 돌을 던지고 몰매를 때렸으며, 도봉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이 당시 군인 월급은 돈이 아니라 쌀로 지급되었다). 군병들은 자..

임오군란 (1882년 고종19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고종 19년; 임오년) 음력 8월에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옛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병란 및 항쟁이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흥선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의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배경 1876년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점차 붕괴되고 대신 국내의 정세는 개국, 개화로 향하게 되었다. 개국 문제를 둘러싸고 정권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와 국왕과 명성황후 측의 척족(戚族)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로 양분, 대립하고 있었다. 외교 노선은 민씨 정권이 문호 개방 정책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구미..

갑신정변(결과와 영향)

결과와 영향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사대당 정부는 더욱 보수적이 되었고 조선에서 청의 세력이 강대해진 가운데 청·일 두 나라의 조선 쟁탈전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하기에 이르렀다.갑신정변을 주도한 이들은 14개조의 개혁요강을 내세우는 등 개화·개혁의 순수성도 있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들이 사대당으로 매도한 이들이 단순히 청나라와 친하자는 세력인지 무조건적 청나라에 사대하자는 세력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으며, 또한 개화파도 철저하게 일본의 힘을 빌려 집권하려는 친일 사대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게 한 구실을 만들었고, 나아가 청나라의 조선 간섭을 심화시켰다.게다가 갑신정변을 선동한 일본은 이듬해인 1885년 4월..

갑신정변(전개)

전개1884년(고종 21) 청나라가 안남(安南) 문제로 프랑스와 싸워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독립당은 청나라가 조선을 돌볼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와 몰래 상의한 끝에 일본의 주둔 병력을 빌려 정변을 일으켜 혁신정부를 세우기로 계획하였다. 무기와 자금을 일본 공사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차관도입시도하여 빌리고 일본 유학생 출신과 사관생도들을 동원하자는 것이었다.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재필·서광범 등 급진개화파 세력들은 1884년 11월 4일 박영효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그때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島村久) 서기관이 참석하였는데, 그는 “서울에 주둔하는 청나라 병사를 구축하는 일은 우리의 1개 중대 150명으로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라고 김옥균과..

갑신정변 (1884년 고종21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고종 21년 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정변이다. 배경 1882년(고종 19)에 일어났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이 대립하게 되었다. 일찍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던 민씨가 청나라에 의존하는 보수 세력으로 되었으니, 왕실 및 민씨 세력의 대표적 인물로는 민영익·민승호 등과 정계의 요인(要人)이었던 김홍집·김만식(金晩植)·어윤중등이 이에 속하였으며, 이 일파를 사대당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민씨 일파의 사대정책에 반대하고 일본 제국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개혁을 단행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를 독립당 또는 개화당이라 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

[주환성의 한국역사] ]"좌초한 갑신정변…그때 우린 너무 젊었다"

2004년은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 120주년이 되는 해. 그해 12월 4일 고균 김옥균(古筠 金玉均·1851∼1894)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일단의 개화파 청년 지식인들은 우정국(서울 종로구 견지동) 개국 축하연에서 당시 집권층인 명성황후 측근세력을 몰아내고 새 정부를 세우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변은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막을 내렸다. 여기서 21세기 우리가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소설가 복거일씨(59)가 갑신정변의 핵심인물 김옥균을 역사 속에서 불러내 가상대담을 나누었다.》 ▽복거일=선생님께선 조선조 말기의 중대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인 그 정변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셨습니다. 사건에 대해 선생님께선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고균 김옥균=실패한 혁명이었죠. 그런 ..

쇼팽에 대하여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가장위대한 피아노 작곡가 출생-사망 1810.3.1.(폴란드) – 1849.10.17. 경력 쇼팽에 대하여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년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은 가장 위대한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가장 위대한 피아노곡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는 그가 20세 때 폴란드를 떠나고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을 때 쓰던 프랑스어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호핀(Fryderyk Franciszek Chopin)이지만, 폴란드어권에서도 프랑스 발음에 맞추어 성을 ‘쇼펜(Szopen)’이라 부르기도 한다. 바르샤바 근교에서 프랑스인 아버..

2010.03.22 (월) I Have Nothing

I Have Nothing 난 아무것도 없어요 http://www.youtube.com/watch?v=FxYw0XPEoKE - Whitney Houston - Share my life 내 인생을 나눠요 Take me for what I am 나를 가져요 Cause I'll never change 난 변하지 않을거니까요 All my colors for you 내 모든 색깔(성격을)을 말이죠 Take my love 내 사랑을 받아요 I'll never ask for too much 난 절대로 너무 많이 요구하진 않을거예요 Just all that you are 그저 당신 지금 그대로 And everything that you do 당신이 지금 하는것 그대로가 좋아요 *I don't really need to..

2010.03.19(금) 행복한 주말되세요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

곧 불꽃놀이가 시작됩니다 HWV 351 왕궁의 불꽃놀이 Royal Fireworks Music 1749년 조지 프리드릭 핸델이 작곡한 모음곡으로, 1749년 4월 27일 런던의 그린 파크에서 불꽃놀이를 열기 위하여 영국의 조지 2세 임금이 요청하여 만든 음악이다. 이때 불꽃놀이 행사는 1748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종식되고 엑스라샤펠 조약이 체결되었음을 축하하기 위해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