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iar Everything 1076

기사환국

기사환국(己巳換局)은 조선 숙종 때 소의(昭儀) 장씨 소생의 아들 윤(昀)을 왕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이 이를 지지한 남인에게 패배하고,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일이다. 일명 기사사화라고도 한다.숙종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장소의가 왕자 윤(昀)을 낳았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원자로 삼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서인들이 반대하므로 남인들의 도움을 얻어 왕자를 원자로 세우려 하니 서인들은 노·소론(老少論)을 막론하고 왕비 민씨(閔氏)가 아직 젊으니 후일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했다. 숙종은 1689년(숙종 15)에 서인의 요청을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名號)를 정하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송시열은 두 번이나 상소를 하여 송나라의 신종(神宗)이 28세에 철종(哲..

노론과 소론

노론(老論)은 조선 붕당정치의 한 당파이다. 조선 중기 이후 서인에서 분파하여 소론과는 대립하는 파벌이었다. 서인의 일파인 소론과 노론은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남인, 북인과 함께 사색당파를 이루었다. 서인의 분파는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청나라와의 관계를 놓고 명분론과 현실론이 대립하면서 싹텄으며, 조선 숙종 대에 이르러 1680년(숙종 6년)의 경신환국 때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송시열도 적소(謫所)에서 돌아와, 영중추부사로 입조하게 되었다. 그런데 서인 중 소장 측에서는 송시열의 논의에 불만을 품는 자가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1682년(숙종 8년) 남인 제거를 꾀한 김익훈(金益勳)을 놓고 소장파가 그의 엄중 처벌을 주장한 데 대해 송시열 등은 그를 신구(伸救)하려 하였다. 1683년(숙종 9년) 송시열이..

경신환국 경신대척출

경신환국(庚申換局)은 1680년(숙종 6년)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한 일로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부른다. 1674년(현종 15년)의 복상 문제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은 남인은 전횡이 심하였고, 숙종으로부터도 그다지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의 영의정 허적(許積)의 유악(油幄; 비가 새지 않도록 기름을 칠한 천막) 사건은 왕으로 하여금 더욱 남인을 꺼리게 하였다. 유악 사건이란, 허적의 조부 허잠의 시호를 맞이하는 잔치를 연날에 숙종의 허락도 없이 군사 용품인 유악을 빌려가자 숙종이 분노하여 군권을 남인에서 서인으로 대거 교체했다. 이때 서인 중 김석주(金錫胄) 등은 허적의 서자인 허견(許堅) 등이 역모한다고 고발하여 옥사(獄事)가 일어나는데, 이를《삼복의 변》이라 한다..

예송(禮訟) 논쟁

예송(禮訟)은 예절에 관한 논란으로, 조선 후기에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1659년 효종 승하 시와 1674년 효종비(妃) 인선왕후의 승하 시에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때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제가 쟁점이 되었기 때문에 복상문제(服喪問題)라고도 부른다. 서인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님을 들어 왕과 사대부에게 동일한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1년설과 9개월설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3년설과 1년설을 각각 주장하여 대립하였다. 인조 이래 서인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있던 남인은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1659년(효종 10년) 효종이 돌아가자 효종의 계모후(繼母后) 자의대비의 복상은 서인의 뜻을 따라 기년..

조선 왕계표

조선 왕계표 1392 태조(太祖), 6년재임, 휘는 성계 위화도 회군,조선왕조건립 1398 정종(定宗), 2년재임, 휘는 방과,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 2년만에 방원에게 왕위물려줌 1400 태종(太宗), 18년재임, 휘는 방원, 왕자의 난에서 이겨 왕이됨, 조선왕조기틀을 세움 1410 1418 세종(世宗), 32년재임, 휘는 도, 태종의셋째아들, 집현전을 두어 학문장려, 훈민정음창제,측우기 해시계 등 과학기구 창제, 북쪽사군과 육진, 남쪽 삼포를 두어 외치에 힘을 씀 1420 1430 1440 1450 문종(文宗), 2년재임, 휘는 향, 인품이 좋고, 문화발달 1452 단종(端宗), 3년재임, 12살에 왕위에 올라 계유사화로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200년후 숙종이 단종이라 왕위를 복위) 14..

출애굽기 관련연표

출애굽기 관련연표 1600 1527 모세의 출생(출2:1,2) 1500 1447 모세와 바로의 1차 접견(출5:1) 1446 이스라엑의 애굽탈출(라암셋출발 출12:37) 홍해도하(출14:11),만나메추라기시작(출16:13,14) 시내광야도착(출19:1),십계명 받음(출20:3-17) 1445 성막 건축(출40:33),레위기의 규례 지시(1~2일) 첫번째 인구조사,시내 산에서 가데스까지 70인 장로 선정,기데스 정탐꾼 파견 1406 모세의 죽음,아론의 죽음,모압 광야 도착 두번째 인구조사,발람과 발락의 사건 후계자 여호수아 임명, 요단 동편 정복 1405 이스라엘의 가나안 도착,요단 강을 건넘 1400 요단서편 땅 분할 1390 여호수아 사망 1375 사사 통치의 시작

창세기 관련연표

창세기 관련연표 창조 노아시대(?) 바벨탑사건(11 1-9) 2800 2700 2600 2500 2400 2300 2200 2166 아브라함의 출생(창11:27) 2100 2091 아브라함의 가나안도착(창12:5,6) 2067 할례제정(창 17:9-14) 2066 이삭의 출생(창21:2,3) 2006 에서와 야곱의 출생(창25:26) 2000 1991 아브라함의 사망(창25:8) 1988 1929 야곱의 하란도피(창 28:10) 1918 유다의 출생(창 29:35) 1915 요셉의 출생(창30:24) 1900 1898 애굽으로 팔려감(창37:36) 1886 이삭의 죽음(창35:29) 1885 애굽의 총리가 됨(창41:46) 1876 야곱의 애굽 이주(창46:7) 1859 야곱의 사망(창49:33) 180..

남인과 북인

남인(南人)은 조선 붕당정치의 당파로, 조선 중기 이후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분파되면서 발생했다. 남인과 북인은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 소론과 함께 사색당파를 형성했다. 서인과 대립하던 동인은 조선 선조 때 일어난 정여립의 역모 사건을 계기로 서인과의 대결에서 상대적으로 온건론을 내세운 남인과 강경파인 북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1591년(선조 24년) 서인 정철이 건저의 사건으로 파직되자 서인 배척에 온건했던 동인 중의 일파이다. 남인은 초기에는 우성전(禹性傳), 이덕형, 유성룡, 김성일, 후기에는 윤휴, 허목(許穆)·허적(許積) 등이 영도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조식을 따르는 선비들은 북인을, 이황의 학파는 남인을 구성했다. 북인은 선조의 사망과 광해군의 등극으로 집권당이 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심의겸과 김효원

심의겸(沈義謙, 1535년 ~ 1587년)은 조선시대의 문신이며 척신이다. 자는 방숙, 호는 손암, 본관은 청송이다. 인순왕후(명종의 비)의 동생이며 이황의 제자로, 명종 때 급제하여 병조좌랑·부수찬·교리·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척신 출신이지만 구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사림들간에 명망이 높았다. 외숙부 이량이 사림들을 탄핵할때 반대로 외숙부 이량을 탄핵하기도 했다. 1572년 김종직 계통의 신진 세력으로서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그가 일찍이 권신이던 윤원형의 집에서 묵은 사실을 들어 권력가에 아부했다 하여 반대하였다. 1574년 결국 김효원은 이조정랑이 되었고, 이듬해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이 후임 이조정랑에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반대함으로써 두 사람은 대립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구세력은 ..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동인(東人)은 조선 시대 붕당정치 초기의 당파로, 1575년(선조 8)의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생긴 당파의 하나이다. 사림파 가운데 기존의 훈구파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가진 젊은 관료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당파이다. 선조 초 김효원과 심의겸에서 비롯된 당파로, 그 명칭은 김효원의 집이 서울의 동쪽에 있던 것에서 유래한다. 동인은 주로 신진 학자로 구성되었고, 이황의 영남학파와도 관계가 있다. 그 중심 인물은 유성룡·이산해 등이며, 1584년(선조 17년) 동인 득세 이후 격렬한 당쟁이 시작되었다. 동인은 또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어 사색당파(四色黨派)를 형성하게 된다. 학문적으로는 이황, 조식, 서경덕 등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였고, 지역적으로는 영남에 기반을 두었으며, 시기적으로는 사림파가 본격적으로..

붕당정치(朋黨政治)

붕당(朋黨)은 조선 중기 이후 특정한 학문적·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양반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 집단이다. 또한 붕당정치(朋黨政治)는 학문적 유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각 붕당들 사이의 공존을 특징으로 하는 조선의 정치 운영 형태이다.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과 견제를 원리로 하는 붕당정치는 현대의 정당정치와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지만 정치적인 이해 관계는 물론 구성원 사이에 학문적 유대 또한 공유했다는 점이 조선 시대 붕당의 특수한 성격이다. 16세기 중엽 동인과 서인 사이의 대립을 최초의 붕당 성립 시기로 본다. 이 시기의 붕당은 특정 가문의 권세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막고,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을 통해 조선 중기 정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19세기 초엽 이후 붕당..

이조 전랑(吏曹銓郞)

이조 전랑(吏曹銓郞)은 조선 시대에 이조의 정랑(정5품)과 좌랑(정6품)을 함께 이르던 말이다. 이조의 정랑과 좌랑은 관원을 천거·전형(銓衡)하는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직책으므로 전랑(銓郞)이라고 불렀다. 조선 시대에는 관원을 선발하는 벼슬이 3공(고려 시대의 태위(太尉)·사도(司徒)·사공(司空))에게 있지 않고 오로지 이조에 속하였다. 또한 이조의 권한이 무거워짐을 염려하여 3사 관원의 선발은 이조판서에게 돌리지 않고 낭관(정랑과 좌랑)에게 오로지 맡겼다. 이에 따라 이조의 낭관이 3사의 언론권을 주관하게 되어 큰 실권을 잡았다. 전랑에는 3사 가운데 특별히 명망높은 사람이 선발되었고, 그 후임은 전랑이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전랑을 거치면 대개 재상까지 될 수 있었다. 동서분당을 초래한 심의겸(沈..

[주환성의 한국역사] 한국의 붕당정치

집권당의 내분이란 5공 이전까지만 해도 대단히 이례적인 사태였다.그러나 과거 집권당이었던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그리고 지금의 집권당인 한나라당에 이르기까지 집권과 더불어 권력이 분열하고 대립하는 현상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과거 군사정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현상이다. 정치의 민주화에 따라 알게 모르게 정당 민주화도 진전돼온 증좌인 셈인가? 그러나 세력투쟁의 측면도 아주 없지는 않아 보인다.왜 특정인 또는 그룹이 집권당의 권세를 오로지 하면서 대다수 구성원을 들러리로 전락시키느냐는 불만이 ‘당정쇄신’의 구호에 묻어 나온다.당내 유력자들의 집단이 주자를 지원함으로써 대선 후보 결정과정을 왜곡시키려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도 강하게 작용하는 듯하다. 이러나 저러나 생각할 수록 참으로 희한하다. 그간 몇 차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