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iar History 46

만주사변(1931.09)

만주 사변(滿洲事變, Manchurian Incident, Mukden Incident, 9·18 사변)은 일본 제국이 1931년 9월 18일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 만철 폭파 사건)을 조작해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중국 침략을 위한 전쟁의 병참 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위해 벌인 침략 전쟁을 말한다. 배경 일본은 만주의 창춘-뤼순간 철도의 이권을 획득하고 관둥저우를 조차한 이후 만주는 일본의 자본투자 · 상품시장 · 중공업원료 공급지로서 일본 이익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펑톈군벌을 원조하며 중국 동북지방을 노렸다. 그러나 장쭤린이 피살되고 장쉐량이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에 합류하게 되자 만주에서도 일본상품을 배척하고 제국주의적 이권을 다시 회수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

신해혁명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은 중국 민족 자산 계급이 주도한 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국을 수립한 혁명이다. 1911년 우창 봉기로 시작되어 남경 임시 정부가 건립(1912년 1월 1일)되었다. 전기 쑨원이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자산계급혁명파를 주체로한 정부)되었으나, 후기 북양군벌 위안스카이는 쑨원이 임시 대총통 지위를 양위하여 임시총통으로 되고 군벌독재체제를 세웠다. 1911년이 12간지로 신해년(辛亥年)이기 때문에 신해혁명이란 이름이 붙었다. 비록 이 혁명으로 공화정이 세워지긴 했지만 곧 위안스카이의 반동정치가 시작되고 이에 대한 반발을 제2혁명으로 부르고 위안스카이 사후 군벌들의 할거에 대한 대항을 제3혁명으로 부른다. 우창에서 최초로 봉기가 일어난 10월 10일은 타이완에서..

중화민국 수립 연보

1910 1911 동맹회의 황흥 등 봉기, 청군에 진압됨 (황화강사건) 무창의 신군 동맹회 봉기,신해혁명 시작 혁명군 무한삼진점령, 중화민국 군정부조직 청조,원세개를 내각총리대신에 임명함 원세개 북경에 입성,내각을 조직 1912 쑨원 남경에서 임시 대총통에 취임, 중화민국을 선포 선통제 퇴위, 원세개 임시공화정부 조직 권한 받음 쑨원 중화민국 임시약법 공포 국회조직법 공포 1913 국민당의 송교인 원세개에게 피살됨 강서도독 이열균 독립선언 안휘 호남 광동 복건 사천도 독립 쑨원 제2혁명에 실패, 다시일본망명 원세개 대총통 취임 원세개 국민당 해산명령 내림 1914 원세개 국회해산 원세개 중화민국 약법을 개정,대총통권한강화 쑨원 일본 동경에서 중화혁명당조직 1915 1 일본 중국에 21개 조항요구 3 국민..

강화도조약 (1876년 고종13년)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은 1876년 2월 27일(고종 13년 음력 2월 3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통상 조약이며, 한일수호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흔히 강화도조약이라 한다. 한일 관계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으며,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일본의 강압적 위협으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이다. 배경 일본은 자신들이 일으킨 운요호 사건을 핑계로 1876년 1월 30일 조선에 군함과 함께 전권대사를 보내 협상을 강요하였다. 이때 일본에서는 정한론의 기조에 따라 운요호 사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사죄, 조선 영해의 자유항행, 강화 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조건으로 조선을 개국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표면상으로 운요호 사건의 평화적 해결, 통상수호조약의 체결이란 구실..

임오군란(결과 및 평가)

결과 및 평가 군변으로 시작한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개입을 확대시키는 국제문제로 변하였고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외세를 빌려 군란을 진압한 민씨 정권은 결국 자주성을 잃고, 정권 유지를 위해 청나라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댓가로 청나라의 숱한 간섭을 받게 되었다. 또 일본과는 7월 17일 임오군란의 뒤처리로 손해배상금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 조약 및 조·일수호조규속약(朝日修好條規續約)을 체결함으로써 자주권을 더욱 잃게 되었다.청나라는 이후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한다. 곧, 원세개(袁世凱)가 지휘하는 군대를 상주시켜 조선 군대를 훈련시키고, 마건상(馬建常)과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이 간여하였다. 또,..

임오군란(경과)

경과 7월 19일(음력 6월 5일), 전라도 조미(全羅道漕米)가 도착되자 선혜청 도봉소(都捧所)에서는 우선 무위영 소속의 옛 훈련도감 군병들에게 1개월분의 급료를 지불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혜청 고직(庫直)의 농간으로 겨와 모래가 섞였을 뿐 아니라 두량(斗量)도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 군료의 수령을 거부하고 시비를 따지게 되었다. 민겸호의 하인인 군료 지급 담당자가 불손한 언동까지 하자 군병들은 격노하였다. 옛 훈련도감 포수(砲手) 김춘영(金春永)·유복만(柳卜萬)·정의길(鄭義吉)·강명준(姜命俊) 등을 선두로 하여 군료의 수령을 거부하고 선혜청 고직과 무위영 영관(營官)에게 돌을 던지고 몰매를 때렸으며, 도봉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이 당시 군인 월급은 돈이 아니라 쌀로 지급되었다). 군병들은 자..

임오군란 (1882년 고종19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고종 19년; 임오년) 음력 8월에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옛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병란 및 항쟁이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흥선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의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배경 1876년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점차 붕괴되고 대신 국내의 정세는 개국, 개화로 향하게 되었다. 개국 문제를 둘러싸고 정권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와 국왕과 명성황후 측의 척족(戚族)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로 양분, 대립하고 있었다. 외교 노선은 민씨 정권이 문호 개방 정책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구미..

갑신정변(결과와 영향)

결과와 영향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사대당 정부는 더욱 보수적이 되었고 조선에서 청의 세력이 강대해진 가운데 청·일 두 나라의 조선 쟁탈전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하기에 이르렀다.갑신정변을 주도한 이들은 14개조의 개혁요강을 내세우는 등 개화·개혁의 순수성도 있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들이 사대당으로 매도한 이들이 단순히 청나라와 친하자는 세력인지 무조건적 청나라에 사대하자는 세력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으며, 또한 개화파도 철저하게 일본의 힘을 빌려 집권하려는 친일 사대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게 한 구실을 만들었고, 나아가 청나라의 조선 간섭을 심화시켰다.게다가 갑신정변을 선동한 일본은 이듬해인 1885년 4월..

갑신정변(전개)

전개1884년(고종 21) 청나라가 안남(安南) 문제로 프랑스와 싸워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독립당은 청나라가 조선을 돌볼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와 몰래 상의한 끝에 일본의 주둔 병력을 빌려 정변을 일으켜 혁신정부를 세우기로 계획하였다. 무기와 자금을 일본 공사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차관도입시도하여 빌리고 일본 유학생 출신과 사관생도들을 동원하자는 것이었다.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재필·서광범 등 급진개화파 세력들은 1884년 11월 4일 박영효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그때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島村久) 서기관이 참석하였는데, 그는 “서울에 주둔하는 청나라 병사를 구축하는 일은 우리의 1개 중대 150명으로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라고 김옥균과..

갑신정변 (1884년 고종21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고종 21년 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정변이다. 배경 1882년(고종 19)에 일어났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이 대립하게 되었다. 일찍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던 민씨가 청나라에 의존하는 보수 세력으로 되었으니, 왕실 및 민씨 세력의 대표적 인물로는 민영익·민승호 등과 정계의 요인(要人)이었던 김홍집·김만식(金晩植)·어윤중등이 이에 속하였으며, 이 일파를 사대당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민씨 일파의 사대정책에 반대하고 일본 제국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개혁을 단행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를 독립당 또는 개화당이라 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

[주환성의 한국역사] ]"좌초한 갑신정변…그때 우린 너무 젊었다"

2004년은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 120주년이 되는 해. 그해 12월 4일 고균 김옥균(古筠 金玉均·1851∼1894)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일단의 개화파 청년 지식인들은 우정국(서울 종로구 견지동) 개국 축하연에서 당시 집권층인 명성황후 측근세력을 몰아내고 새 정부를 세우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변은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막을 내렸다. 여기서 21세기 우리가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소설가 복거일씨(59)가 갑신정변의 핵심인물 김옥균을 역사 속에서 불러내 가상대담을 나누었다.》 ▽복거일=선생님께선 조선조 말기의 중대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인 그 정변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셨습니다. 사건에 대해 선생님께선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고균 김옥균=실패한 혁명이었죠. 그런 ..

기사환국

기사환국(己巳換局)은 조선 숙종 때 소의(昭儀) 장씨 소생의 아들 윤(昀)을 왕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이 이를 지지한 남인에게 패배하고,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일이다. 일명 기사사화라고도 한다.숙종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장소의가 왕자 윤(昀)을 낳았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원자로 삼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서인들이 반대하므로 남인들의 도움을 얻어 왕자를 원자로 세우려 하니 서인들은 노·소론(老少論)을 막론하고 왕비 민씨(閔氏)가 아직 젊으니 후일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했다. 숙종은 1689년(숙종 15)에 서인의 요청을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名號)를 정하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송시열은 두 번이나 상소를 하여 송나라의 신종(神宗)이 28세에 철종(哲..

노론과 소론

노론(老論)은 조선 붕당정치의 한 당파이다. 조선 중기 이후 서인에서 분파하여 소론과는 대립하는 파벌이었다. 서인의 일파인 소론과 노론은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남인, 북인과 함께 사색당파를 이루었다. 서인의 분파는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청나라와의 관계를 놓고 명분론과 현실론이 대립하면서 싹텄으며, 조선 숙종 대에 이르러 1680년(숙종 6년)의 경신환국 때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송시열도 적소(謫所)에서 돌아와, 영중추부사로 입조하게 되었다. 그런데 서인 중 소장 측에서는 송시열의 논의에 불만을 품는 자가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1682년(숙종 8년) 남인 제거를 꾀한 김익훈(金益勳)을 놓고 소장파가 그의 엄중 처벌을 주장한 데 대해 송시열 등은 그를 신구(伸救)하려 하였다. 1683년(숙종 9년) 송시열이..

경신환국 경신대척출

경신환국(庚申換局)은 1680년(숙종 6년)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한 일로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부른다. 1674년(현종 15년)의 복상 문제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은 남인은 전횡이 심하였고, 숙종으로부터도 그다지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의 영의정 허적(許積)의 유악(油幄; 비가 새지 않도록 기름을 칠한 천막) 사건은 왕으로 하여금 더욱 남인을 꺼리게 하였다. 유악 사건이란, 허적의 조부 허잠의 시호를 맞이하는 잔치를 연날에 숙종의 허락도 없이 군사 용품인 유악을 빌려가자 숙종이 분노하여 군권을 남인에서 서인으로 대거 교체했다. 이때 서인 중 김석주(金錫胄) 등은 허적의 서자인 허견(許堅) 등이 역모한다고 고발하여 옥사(獄事)가 일어나는데, 이를《삼복의 변》이라 한다..

예송(禮訟) 논쟁

예송(禮訟)은 예절에 관한 논란으로, 조선 후기에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1659년 효종 승하 시와 1674년 효종비(妃) 인선왕후의 승하 시에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때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제가 쟁점이 되었기 때문에 복상문제(服喪問題)라고도 부른다. 서인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님을 들어 왕과 사대부에게 동일한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1년설과 9개월설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3년설과 1년설을 각각 주장하여 대립하였다. 인조 이래 서인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있던 남인은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1659년(효종 10년) 효종이 돌아가자 효종의 계모후(繼母后) 자의대비의 복상은 서인의 뜻을 따라 기년..

조선 왕계표

조선 왕계표 1392 태조(太祖), 6년재임, 휘는 성계 위화도 회군,조선왕조건립 1398 정종(定宗), 2년재임, 휘는 방과,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 2년만에 방원에게 왕위물려줌 1400 태종(太宗), 18년재임, 휘는 방원, 왕자의 난에서 이겨 왕이됨, 조선왕조기틀을 세움 1410 1418 세종(世宗), 32년재임, 휘는 도, 태종의셋째아들, 집현전을 두어 학문장려, 훈민정음창제,측우기 해시계 등 과학기구 창제, 북쪽사군과 육진, 남쪽 삼포를 두어 외치에 힘을 씀 1420 1430 1440 1450 문종(文宗), 2년재임, 휘는 향, 인품이 좋고, 문화발달 1452 단종(端宗), 3년재임, 12살에 왕위에 올라 계유사화로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200년후 숙종이 단종이라 왕위를 복위) 14..

출애굽기 관련연표

출애굽기 관련연표 1600 1527 모세의 출생(출2:1,2) 1500 1447 모세와 바로의 1차 접견(출5:1) 1446 이스라엑의 애굽탈출(라암셋출발 출12:37) 홍해도하(출14:11),만나메추라기시작(출16:13,14) 시내광야도착(출19:1),십계명 받음(출20:3-17) 1445 성막 건축(출40:33),레위기의 규례 지시(1~2일) 첫번째 인구조사,시내 산에서 가데스까지 70인 장로 선정,기데스 정탐꾼 파견 1406 모세의 죽음,아론의 죽음,모압 광야 도착 두번째 인구조사,발람과 발락의 사건 후계자 여호수아 임명, 요단 동편 정복 1405 이스라엘의 가나안 도착,요단 강을 건넘 1400 요단서편 땅 분할 1390 여호수아 사망 1375 사사 통치의 시작

창세기 관련연표

창세기 관련연표 창조 노아시대(?) 바벨탑사건(11 1-9) 2800 2700 2600 2500 2400 2300 2200 2166 아브라함의 출생(창11:27) 2100 2091 아브라함의 가나안도착(창12:5,6) 2067 할례제정(창 17:9-14) 2066 이삭의 출생(창21:2,3) 2006 에서와 야곱의 출생(창25:26) 2000 1991 아브라함의 사망(창25:8) 1988 1929 야곱의 하란도피(창 28:10) 1918 유다의 출생(창 29:35) 1915 요셉의 출생(창30:24) 1900 1898 애굽으로 팔려감(창37:36) 1886 이삭의 죽음(창35:29) 1885 애굽의 총리가 됨(창41:46) 1876 야곱의 애굽 이주(창46:7) 1859 야곱의 사망(창49:33) 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