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iar History 53

기독교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바탕을 둔 종교이다. 유일신을 섬기는 아브라함 종교이며, 그리스도교 또는 크리스트교라고도 한다.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로서 인류를 구원하려 이 세상에 온 그리스도라고 믿는다. 예수의 행적은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함께 기독교의 경전을 이룬다. 기독교는 약 24억 명의 신자가 있는 세계 최대의 종교이다.[1] 기독교에는 많은 종파가 있고 크게 서방 기독교와 동방 기독교로 나뉜다. 종파마다 구원론, 교회론, 사제론, 그리스도론 등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 대체로 기독교 종파들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나 가르침을 펼치다가 수난을 받고 십자가형을 받아 죽었으나, 이로써 인류를 구원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했다고 믿는다. ..

성경관련연표

구분 연도 성경 창세기 관련연표 B.C 창조 노아시대(?) 바벨탑사건(11 1-9) 2800 2700 2600 2500 2400 2300 2200 2166 아브라함의 출생(창11:27) 2100 2091 아브라함의 가나안도착(창12:5,6) 2067 할례제정(창 17:9-14) 2066 이삭의 출생(창21:2,3) 2006 에서와 야곱의 출생(창25:26) 2000 1991 아브라함의 사망(창25:8) 1988 1929 야곱의 하란도피(창 28:10) 1918 유다의 출생(창 29:35) 1915 요셉의 출생(창30:24) 1900 1898 애굽으로 팔려감(창37:36) 1886 이삭의 죽음(창35:29) 1885 애굽의 총리가 됨(창41:46) 1876 야곱의 애굽 이주(창46:7) 1859 야곱의 사..

[주환성의 한국역사] 친일문제를 바라보는 또 다른 단상

우리시대의 민감한 이슈인 친일파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지식인 윤치호를 통해 친일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한 책이 있어 최근에 읽었는데 좋은 책이었습니다. 책값도 비싸지 않고.... 윤치호는 갑신정변 이전에 일본에서 공부했고, 갑신정변 직후에는 개화파로 몰려 중국 상하이로 피신하여 그곳 중서서원에서 4년간 유학했고 1888년에 미국 내쉬빌의 밴더빌트 대학과 에모리 대학에서 5년간 공부한 후 귀국하여 본격적으로 국내정치 무대에서 활동한 정치인입니다. 그는 19세인 1883년부터 한문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하다가 다시 한글로 약 1년간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미국유학시절인 1889년부터는 영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 이후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영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데 자그마치 5..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군인 이동휘, 기독교 전도사로 변신하다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군인 이동휘, 기독교 전도사로 변신하다 1909.8.29.~1910.8.29. 대한제국 참령 이동휘(1873~1935)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 자신이 직접 매국 오적을 처단한 뒤 자결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고는 고종, 이천만 동포형제, 진신(縉紳·모든 벼슬아치), 법관, 을사오적, 각국 공사관 사절,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등에게 보내는 유서 8통을 썼다. 대한제국 군인으로서 국가를 보위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거사와 자결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기독교와 관계 깊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죽음 앞에서 동포들에게 쓴 유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가 아니면 상애지..

원나라 년보

원 왕조의 계보 (1 칭키즈칸1206 ~ 15순제1370) 1206 1 칭기즈칸(태조) ~ 1227 1210 1219 칭기즈칸 제1차 서정 1220 1229 2 오고타이(태종) ~ 1241 1230 1236 오고타이 제2차 서정 ~ 1242 1240 1246 3 구유크(정종) ~ 1248 1250 1251 툴루이(예종) 원(元) 4 몽케(헌종) 1253 몽케 제3차 서정 ~ 1260 1260 5 쿠빌라이(세조) ~ 1294 1270 1271 쿠비라이가 국호를 원元으로 바꾸다 1272 중도를 대도로 바꾸었다 1273 양번 전투에서 원의 군대가 번성을 격파 1275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왔다 1279 남송이 멸망 곽수경이 27개 관측점을 통해 대규모로 위도측량 1280 1281 쿠빌라이가 일본에 원정군을 보..

명나라 청나라 년보

명나라 계보 (1 홍무제1368 ~ 17 숭정제1644) 1368 1 홍무제(태조,원장) ~ 1398 1369 천하의 부 주 현에 모두 학교를 세우도록 조서 1370 과거제도 시행하라는 조서 1374 시박사를 없애고 해금 정책을 엄격히 실행 1381 세금을정하고 호적제도, 부역을 위한 황책만듦 1388 명 왕조가 몇 해에 결친 남방 정벌마치고 통일완성 1390 1398 2 혜제(건문제 공민제,윤문) ~ 1402 1399 정남의 역으로 연왕 주체가 남경을 무너뜨리고 황제에 올랐음 1400 1402 3 영락제(태종 성조,체) ~ 1424 1403 환관을 군대에 파견하여 명대에 환관 전권을 휘두르는 계기를 마련 1405 정화가 7차에 걸쳐 서양을 항해 ~ 1433 1406 영락제는 현재베트남인 안남에 출병,병..

만주사변(1931.09)

만주 사변(滿洲事變, Manchurian Incident, Mukden Incident, 9·18 사변)은 일본 제국이 1931년 9월 18일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 만철 폭파 사건)을 조작해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중국 침략을 위한 전쟁의 병참 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위해 벌인 침략 전쟁을 말한다. 배경 일본은 만주의 창춘-뤼순간 철도의 이권을 획득하고 관둥저우를 조차한 이후 만주는 일본의 자본투자 · 상품시장 · 중공업원료 공급지로서 일본 이익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펑톈군벌을 원조하며 중국 동북지방을 노렸다. 그러나 장쭤린이 피살되고 장쉐량이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에 합류하게 되자 만주에서도 일본상품을 배척하고 제국주의적 이권을 다시 회수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

신해혁명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은 중국 민족 자산 계급이 주도한 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국을 수립한 혁명이다. 1911년 우창 봉기로 시작되어 남경 임시 정부가 건립(1912년 1월 1일)되었다. 전기 쑨원이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자산계급혁명파를 주체로한 정부)되었으나, 후기 북양군벌 위안스카이는 쑨원이 임시 대총통 지위를 양위하여 임시총통으로 되고 군벌독재체제를 세웠다. 1911년이 12간지로 신해년(辛亥年)이기 때문에 신해혁명이란 이름이 붙었다. 비록 이 혁명으로 공화정이 세워지긴 했지만 곧 위안스카이의 반동정치가 시작되고 이에 대한 반발을 제2혁명으로 부르고 위안스카이 사후 군벌들의 할거에 대한 대항을 제3혁명으로 부른다. 우창에서 최초로 봉기가 일어난 10월 10일은 타이완에서..

중화민국 수립 연보

1910 1911 동맹회의 황흥 등 봉기, 청군에 진압됨 (황화강사건) 무창의 신군 동맹회 봉기,신해혁명 시작 혁명군 무한삼진점령, 중화민국 군정부조직 청조,원세개를 내각총리대신에 임명함 원세개 북경에 입성,내각을 조직 1912 쑨원 남경에서 임시 대총통에 취임, 중화민국을 선포 선통제 퇴위, 원세개 임시공화정부 조직 권한 받음 쑨원 중화민국 임시약법 공포 국회조직법 공포 1913 국민당의 송교인 원세개에게 피살됨 강서도독 이열균 독립선언 안휘 호남 광동 복건 사천도 독립 쑨원 제2혁명에 실패, 다시일본망명 원세개 대총통 취임 원세개 국민당 해산명령 내림 1914 원세개 국회해산 원세개 중화민국 약법을 개정,대총통권한강화 쑨원 일본 동경에서 중화혁명당조직 1915 1 일본 중국에 21개 조항요구 3 국민..

강화도조약 (1876년 고종13년)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은 1876년 2월 27일(고종 13년 음력 2월 3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통상 조약이며, 한일수호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흔히 강화도조약이라 한다. 한일 관계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으며,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일본의 강압적 위협으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이다. 배경 일본은 자신들이 일으킨 운요호 사건을 핑계로 1876년 1월 30일 조선에 군함과 함께 전권대사를 보내 협상을 강요하였다. 이때 일본에서는 정한론의 기조에 따라 운요호 사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사죄, 조선 영해의 자유항행, 강화 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조건으로 조선을 개국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표면상으로 운요호 사건의 평화적 해결, 통상수호조약의 체결이란 구실..

임오군란(결과 및 평가)

결과 및 평가 군변으로 시작한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개입을 확대시키는 국제문제로 변하였고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외세를 빌려 군란을 진압한 민씨 정권은 결국 자주성을 잃고, 정권 유지를 위해 청나라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댓가로 청나라의 숱한 간섭을 받게 되었다. 또 일본과는 7월 17일 임오군란의 뒤처리로 손해배상금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 조약 및 조·일수호조규속약(朝日修好條規續約)을 체결함으로써 자주권을 더욱 잃게 되었다.청나라는 이후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한다. 곧, 원세개(袁世凱)가 지휘하는 군대를 상주시켜 조선 군대를 훈련시키고, 마건상(馬建常)과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이 간여하였다. 또,..

임오군란(경과)

경과 7월 19일(음력 6월 5일), 전라도 조미(全羅道漕米)가 도착되자 선혜청 도봉소(都捧所)에서는 우선 무위영 소속의 옛 훈련도감 군병들에게 1개월분의 급료를 지불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혜청 고직(庫直)의 농간으로 겨와 모래가 섞였을 뿐 아니라 두량(斗量)도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 군료의 수령을 거부하고 시비를 따지게 되었다. 민겸호의 하인인 군료 지급 담당자가 불손한 언동까지 하자 군병들은 격노하였다. 옛 훈련도감 포수(砲手) 김춘영(金春永)·유복만(柳卜萬)·정의길(鄭義吉)·강명준(姜命俊) 등을 선두로 하여 군료의 수령을 거부하고 선혜청 고직과 무위영 영관(營官)에게 돌을 던지고 몰매를 때렸으며, 도봉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이 당시 군인 월급은 돈이 아니라 쌀로 지급되었다). 군병들은 자..

임오군란 (1882년 고종19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고종 19년; 임오년) 음력 8월에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옛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병란 및 항쟁이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흥선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의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배경 1876년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점차 붕괴되고 대신 국내의 정세는 개국, 개화로 향하게 되었다. 개국 문제를 둘러싸고 정권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와 국왕과 명성황후 측의 척족(戚族)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로 양분, 대립하고 있었다. 외교 노선은 민씨 정권이 문호 개방 정책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구미..

갑신정변(결과와 영향)

결과와 영향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사대당 정부는 더욱 보수적이 되었고 조선에서 청의 세력이 강대해진 가운데 청·일 두 나라의 조선 쟁탈전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하기에 이르렀다.갑신정변을 주도한 이들은 14개조의 개혁요강을 내세우는 등 개화·개혁의 순수성도 있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들이 사대당으로 매도한 이들이 단순히 청나라와 친하자는 세력인지 무조건적 청나라에 사대하자는 세력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으며, 또한 개화파도 철저하게 일본의 힘을 빌려 집권하려는 친일 사대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게 한 구실을 만들었고, 나아가 청나라의 조선 간섭을 심화시켰다.게다가 갑신정변을 선동한 일본은 이듬해인 1885년 4월..

갑신정변(전개)

전개1884년(고종 21) 청나라가 안남(安南) 문제로 프랑스와 싸워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독립당은 청나라가 조선을 돌볼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와 몰래 상의한 끝에 일본의 주둔 병력을 빌려 정변을 일으켜 혁신정부를 세우기로 계획하였다. 무기와 자금을 일본 공사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차관도입시도하여 빌리고 일본 유학생 출신과 사관생도들을 동원하자는 것이었다.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재필·서광범 등 급진개화파 세력들은 1884년 11월 4일 박영효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그때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島村久) 서기관이 참석하였는데, 그는 “서울에 주둔하는 청나라 병사를 구축하는 일은 우리의 1개 중대 150명으로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라고 김옥균과..

갑신정변 (1884년 고종21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고종 21년 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정변이다. 배경 1882년(고종 19)에 일어났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이 대립하게 되었다. 일찍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던 민씨가 청나라에 의존하는 보수 세력으로 되었으니, 왕실 및 민씨 세력의 대표적 인물로는 민영익·민승호 등과 정계의 요인(要人)이었던 김홍집·김만식(金晩植)·어윤중등이 이에 속하였으며, 이 일파를 사대당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민씨 일파의 사대정책에 반대하고 일본 제국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개혁을 단행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를 독립당 또는 개화당이라 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

[주환성의 한국역사] ]"좌초한 갑신정변…그때 우린 너무 젊었다"

2004년은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 120주년이 되는 해. 그해 12월 4일 고균 김옥균(古筠 金玉均·1851∼1894)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일단의 개화파 청년 지식인들은 우정국(서울 종로구 견지동) 개국 축하연에서 당시 집권층인 명성황후 측근세력을 몰아내고 새 정부를 세우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변은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막을 내렸다. 여기서 21세기 우리가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소설가 복거일씨(59)가 갑신정변의 핵심인물 김옥균을 역사 속에서 불러내 가상대담을 나누었다.》 ▽복거일=선생님께선 조선조 말기의 중대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인 그 정변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셨습니다. 사건에 대해 선생님께선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고균 김옥균=실패한 혁명이었죠. 그런 ..